2022.3.25-4.9
< Per Fumum > 이지연 개인전, GALLERY SP
그림의 향기
이성휘 (하이트컬렉션 큐레이터)
전시장에 들어선 당신은 지금 풍성한 꽃들에 둘러싸여 있을 것이다. 어떤 꽃, 어떤 그림부터 들여다볼지 휘둥그레 하며 잠시 멈춰 서 있을지도 모르지만, 당신이 보는 광경은 얼마전 필자가 이지연의 작업실에 들어섰을 때 마주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다만, 화이트 큐브는 작업실보다 훨씬 정돈된 곳이고 관람자의 동선이나 시선의 위치를 적절히 고려하여 그림을 배치하는 만큼 당신의 시선이 그림들에 금세 익숙해지길 바란다. 그림 속의 다양한 꽃과 풀, 나무, 그리고 하늘에까지.
이지연은 근래 자신이 풀과 나무가 나 있는 길을 따라 눈으로 만져보고 더듬어 보는 일을 하고 이를 그림으로 그리고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우리가 보는 그림은 그가 눈으로 만지고 더듬은 감각이 캔버스 위에서 붓과 물감을 통해 또 다른 감각으로 전환된 것이다. 2020년경부터 작가는 산책로 시리즈와 부케 시리즈를 선보이고 있는데, 산책로 작업이 자연에 대한 작가의 경험을 적절하게 펼쳐 놓은 것이라면, 부케 작업은 마치 플로리스트가 부케를 만들 듯 작가가 주관적으로 꽃과 자연을 취사 선택하여 한다발의 정물화로 구성한 작업이다. 이 선택의 과정에는 자연에 대한 사색뿐만 아니라 회화라는 장르에 대한 생각이 상당했을 것으로 보인다. 원추형으로 돌려 모아진 부케 하단의 강렬한 직선들이 유난히 그 고민을 짐작케 한다.
대략 2-3년 전부터 이지연은 본격적으로 산책로에서 보게 되는 꽃과 나무, 식물을 풍경 또는 정물의 모습으로 그리기 시작했다. 산책로 시리즈의 선명하고 생동감이 넘치는 다양한 꽃들과 나무, 식물들로 캔버스가 꽉 채워진 화면, 그리고 꼿꼿하게 세워진 원추형 하단부가 인상적인 꽃다발 부케는 이지연이 아직 신진 작가임에도 불구하고 벌써 그의 시그니처 작업들로 인식되고 있다. 그리고 이번 개인전에서도 작가는 이전 작업들의 연장선상에서 작업을 진행하였다. 화려한 색감, 물감의 강한 마티에르, 단순한 묘사로 인해 다소 천진난만해 보이기까지 하는 그림들 앞에서, 그러나 필자는 작가가 처음부터 자연을 대상으로 삼거나 천진난만하게 그림을 그렸던 것이 아님을 알기에 그 변화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이지연은 2018년에 개최한 첫 개인전 《깨끗하고 밝은 곳(A Clean, Well-lighted Place)》(갤러리 175, 서울, 2018)에서 ‘-환경+과정=완성’이라는 작업노트를 공개했던 적이 있다. 이 작업노트의 ‘+과정’ 대목을 인용해보겠다: “내가 의도하는 대로 길이 펼쳐지지 않는다는 불가항력적인 사실을 받아들이는 과정에는 무기력감과 동시에 안락한 감정이 교차한다. 상황이 매번 바뀌고 그럴 때마다 나 자신을 방어하고 적응하도록 만들기 위한 경험과 훈련을 반복하면서 기억이나 있지도 않은 상황을 만들어내는 풍경이 아닌 순간을 기록하는 회화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순간을 그림으로 기록한다는 것은 회화가 내재한 행위에 대한 물음으로 이어진다. 회화는 그리는 행위가 발생하는 동안 감상자가 없지만 행위가 모두 끝나고 난 후에야 비로소 감상자가 오롯이 그림 앞에 서서 감상하게 된다.” 이 글에서 이지연은 그림이 완성되어 감상자 앞에 서기 전, 온전히 화가의 행위가 발생하는 과정에 있는 순간에 대해서 골똘히 생각하고 있다. 당시 그가 그린 소재는 먼지가 굴러다니고 물감 자국이 덕지덕지 묻어 있는 작업실 바닥이나 시멘트 공구리가 된 화단턱이었는데 작가는 이것들을 세상과의 대면을 통해 발견한 것이 아니라, 작업실에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작가로서 그림을 그려야 하는 당위성에 대해 고민할 때 작가의 발에 닿아 있었을 뿐이었다. 그림은 현실도피의 빌미가 되기도 하겠지만 작가에게 가장 엄중한 현실이기도 하다. 그림을 그려야 하는 당위성을 고민할 때 작가는 시선을 멀리 두지 못하고 실기실로 향하는 도중에 보잘것없이 발길에 치이는 화단턱이나 실기실 바닥에 떨어진 물감자국에 시선을 두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그림들은 추상화라고 해도 될 만큼 구체적인 지시대상도 없어 보였다. 먼지나 물감자국을 캔버스 화면에 나른하게 재현한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침잠되어 있는 작가의 심상을 캔버스로 떠낸 것 같은 평면들이었다.
이후 작가는 점차 시선을 멀리 두게 된 듯 2018년 말부터 덤불을 그리기 시작하였다. 이전보다 캔버스의 크기도 커졌고 누가 봐도 화면 가득 수풀이 엉킨 풍경으로 보이는 그림들이었다. 이전 그림들과 비교했을 때 선명한 원색을 적극적으로 사용하고 붓의 필치가 역동적으로 변했기에 당시 필자는 이지연에게 그림에서 얼마나 원근이 느껴지고 얼마나 생동적인 풍경으로 보이는지에 대해 주로 언급했던 것 같다. 필자는그가 정말로 덤불을 묘사하는 것에 관심을 가졌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돌이켜 볼 때 이지연에게 자연의 환영은 크게 중요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가 당시 작업들로 개최한 개인전이 《살과 살(Skin to Skin)》(서교예술실험센터, 서울, 2019)인데 일단 전시제목부터 풍경과는 동떨어져 보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림을 그리는 과정, 캔버스 위에 얹혀지는 작가의 신체적 감각이 유의미한 것으로 보인다. 작가는 주위 풍경에 시선이 머물었던 순간의 감각이 캔버스 위에서 신체적 감각으로 전환되는 것에 집중하였고, 화면상의 뒤엉킨 덤불만큼이나 강렬한 퍼포먼스로 캔버스 표면과 신체적인 접촉을 겪었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살과 살 사이의 감각적 교감이고, 오롯이 화가만이 감각하는 긴밀한 접촉인 것이다.
이지연은 개인전 《Green Dipped Brush》(누크 갤러리, 서울, 2020)에서부터 본격적으로 산책로 시리즈와 부케 시리즈를 선보였다. 작가는 산책로 주변의 꽃과 식물, 나무들의 형태와 질감을 눈에 담아 기억했다가 캔버스 위에서 붓과 물감을 통해 새로운 감각으로 펼쳐냈다. 초록색 물감에 붓이 풍덩 담겨 묻혀지는 모양, 그 붓으로 캔버스 천에 획을 그어 형태를 만들어 나가는 신체적인 과정을 다시 감각하면서 작가는 산책로를 훑어보듯 그림 속을 다시 훑어보는 것이다. 그렇게 감각이 역순환 되면 강한 붓질로 물감을 올리던 순간의 신체 감각이 붓질 사이를 다시 비집고 올라온다. 그래서 꽃이 흐드러진 덤불 속에서 독서하는 이는 어쩌면 책이 아니라 캔버스 위로 지나간 붓의 흔적과 켜켜이 쌓인 물감 사이를 들여다보고 있는 작가를 빗댄 것일지도 모른다. 그의 산책로 그림은 유난히도 나무, 나뭇가지, 풀, 잎, 꽃, 벌레들이 덤불을 이룰 만큼 수없이 겹쳐 있다. 그런데 이 자연의 모티프들이 화면 위에서 벌이는 일은 자연의 생김새를 보이는 것이 아니라 화면의 틈과 틈 사이를 비집고 조형적 모티프 그 자체로 생동감 있게 존재하는 것이다. 그것은 나뭇잎처럼 보일 것, 꽃잎처럼 보일 것, 오디 열매처럼 보일 것이 아니라, 힘을 준 붓질의 획일 것, 두껍게 올라간 물감 덩어리일 것, 노란 색일 것, 빨간 색일 것, 또는 녹색일 것, 즉 물감과 붓질은 화가가 캔버스 위에 임하게 한 그대로 존재할 것이다. 그 틈에서 스마일/얼굴처럼 보이는 무언가를 발견한다면 그것 역시 스마일/얼굴이 아니라 까만 점이 찍힌 노란 물감의 형상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다.
이번 개인전에서도 작가의 관심사는 ‘무엇처럼 보이게 하는 것’이 아니라, 화면이 갖는 힘, 그리고 조형적인 탐구로 한층 더 나아가고 있음이 감지된다. 짙은 녹색조와 강렬한 붓의 스트로크가 인상적인 < 무제(Untitled) >(2021) 연작은 이전의 덤불 그림들을 연상시키기도 하지만, 각 캔버스마다 확연하게 구분되는 붓질을 의도적으로 행함으로써 전체적으로 붓질의 힘이 두드러지는 작업이다. 이 연작에서 작가는 붓질을 통해 화면을 장악하는 방법을 모색한다. 타원 형태의 스트로크를 반복적으로 그려 휘몰아치는 동세가 느껴지는 캔버스, 뒤엉킨 수풀을 파헤치듯 한없이 뒤엉킨 스트로크가 뭉개어지지 않고 모두 살아 있는 것을 보여주는 캔버스, 그리고 둔탁하지만 좀더 가까이 다가와 결기 있는 붓질을 보여주는 캔버스. 여기에서 우리는 수풀을 보고, 나무를 보기도 하지만, 각 획들에 실린 작가의 결기, 그리고 그 의지가 화면을 장악하는 힘 또한 중요한 것이다. < 갈대와 수국 >(2022) 작업들 역시 이전의 산책로 시리즈와 비교할 때 조형적 탐구 성격이 강하게 나타난다. 이 그림들은 기실 자연스러운 풍경으로 다가오지만, 작가는 부케 시리즈처럼 임의의 자연을 취사선택하여 화면에 모음으로써 실재하지 않는 풍경을 실재하는 것처럼 만들어냈다. 그리고 작가가 취사선택한 자연들은 무엇보다도 조형적 탐구의 재미를 선사한다. 예를 들면 이지연이 한 쌍의 조합으로 선택한 갈대와 수국은 형태적으로 유사하면서도 차이가 있는데, 그는 두 식물 모두에 삼각형 형태를 반복하면서도 선묘와 점묘의 대비로 붓질에 차이를 주었다. 그리고 그 리듬과 밀도의 차이가 전체적인 그림의 인상을 결정하고 있다. 갈대와 다른 식물들을 조합한 풍경에서도 작가는 형상에 따라 붓질의 방법을 달리하여, 붓질을 길게 할 때와 짧게 할 때, 또 힘을 줄 때와 뺄 때의 감각, 점을 하나씩 찍을 때의 감각이 모든 다르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는 좀처럼 넓은 면적을 느슨한 붓질로 채운 표현을 보여주지 않는다. 느슨함을 기대하지 말라는 듯 신경을 곤두세우고 꼿꼿이 서 있는 작업이 부케 시리즈다. 각양각색의 식물들을 한다발로 묶어 세운 이 부케 시리즈는 논리적으로는 실재할 수 없지만 풍성한 한다발의 식물 그 자체로 자연이 주는 힘을 갖고 생명력을 획득한다. 회화적으로는 부케 상단부와 하단부의 대비를 구상과 추상의 대비이자 조합으로 볼 수 있는데, 상단부가 자연의 생명력으로 어필한다면, 원추형 하단부는 붓질의 힘, 즉 회화의 힘을 어필한다. 그런데 신작 부케 작업들은 이전 작업들보다 평면적인 그림으로 변모하고 있는 듯하다. 이전 부케 시리즈는 별도의 공간적 배경 묘사 없이 단색 바탕에 그렸어도 공간적인 시선의 깊이가 보였는데, 신작 부케들은 대체로 화면 아래에 부케가 놓인 바닥이 묘사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부케 자체는 시선의 깊이가 사라지고 훨씬 평면적으로 바뀌었다. 화면 위의 모든 장치들은, 예컨대 꽃, 잎, 풀들로 불릴 형상들과 배경과 바닥으로 구분될 면분할은, 한아름의 꽃다발을 위해서 라기보다는 물감을 바르고 붓질을 하기 위해서, 화면의 조형적 가능성을 타진하기 위해서 취사 선택되거나 구성되어진 모티프들에 훨씬 가깝다.
우리는 이미지를 모방이자 환영이라고 쉽게 치부한다. 그런데 이지연은 그리는 행위가 발생하는 작업실에서 화가에게 이미지는 물질로 먼저 실재하며 화가의 오감을 온통 자극하여 얼마나 곤두서게 만드는지를 보여준다. 이번 개인전에 소개될 작업들을 보기 위해 필자가 작업실을 방문했을 때 그는 작업실 사방 벽을 모두 캔버스로 둘러놓았었다. 전시 준비가 막바지였던 시점이기에 대부분 벌써 완성되었거나 아니면 마무리 작업이 한창인 그림들이었다. 당연히 작업실은 물감 냄새가 진동하였다. 지난 1년 여 동안 직장인처럼 작업실로 출퇴근하며 성실하게 작업만 해온 작가는 자신의 출퇴근 루틴을 덤덤하게 말해주었는데, 인상적으로 들린 것은 작업실에서 밴 물감 냄새가 집에 가면 너무 지독하게 느껴져서 작업실 출퇴근용 복장과 그 외 일상복을 철저히 구분했다는 것이었다. 화가들에게 물감 냄새는 당연한 것이겠지만 후각만큼 기억에 큰 영향을 끼치는 신체 감각도 없으므로 그가 굳이 이를 언급한 이유가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perfume(항수)’의 어원인 ‘per fumum’이 전시제목이 될 거라는 설명까지 들었지만 그날 필자는 이를 물감 냄새와 연결해서 생각하지 못했다. 이 글을 쓰는 지금에서야 전시제목 《페르푸뭄(Per Fumum)》이 지난 1년 동안 이지연의 작업실을 가득 채운, 작가가 후각으로 기억하는 작업의 모든 순간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연기가 통한다’라는 뜻의 라틴어인 ‘per fumum’은 메소포타미아 문명이나 이집트 문명에서 제례나 의식을 치를 때 신과의 교감을 위해서 꽃이나 나뭇잎을 태워 훈향을 낸 것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전시제목을 그림의 대상이 된 꽃들의 향기로 받아들여도 무방하겠지만, 기실 작가에게는 지난 1년 동안 작업실에서 붓질을 통해서 피워낸 물감의 훈향일 것이다. 그리고 고대인들이 꽃이나 식물의 훈향으로 신과의 교감을 절실하게 원했던 것처럼 작업실의 화가에게는 그림과의 교감이 절실했을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보는 이지연의 그림이 자연의 환영 그 이상일 수밖에 없는 이유이며, 완성된 그림이 관람자 앞으로 간 이후에도 오롯이 화가의 기억으로 새겨지는 방식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