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3.25-4.9
< Per Fumum > 이지연 개인전, GALLERY SP

그림의 향기
이성휘 (하이트컬렉션 큐레이터)

전시장에 들어선 당신은 지금 풍성한 꽃들에 둘러싸여 있을 것이다. 어떤 꽃, 어떤 그림부터 들여다볼지 휘둥그레 하며 잠시 멈춰 서 있을지도 모르지만, 당신이 보는 광경은 얼마전 필자가 이지연의 작업실에 들어섰을 때 마주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다만, 화이트 큐브는 작업실보다 훨씬 정돈된 곳이고 관람자의 동선이나 시선의 위치를 적절히 고려하여 그림을 배치하는 만큼 당신의 시선이 그림들에 금세 익숙해지길 바란다. 그림 속의 다양한 꽃과 풀, 나무, 그리고 하늘에까지.

이지연은 근래 자신이 풀과 나무가 나 있는 길을 따라 눈으로 만져보고 더듬어 보는 일을 하고 이를 그림으로 그리고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우리가 보는 그림은 그가 눈으로 만지고 더듬은 감각이 캔버스 위에서 붓과 물감을 통해 또 다른 감각으로 전환된 것이다. 2020년경부터 작가는 산책로 시리즈와 부케 시리즈를 선보이고 있는데, 산책로 작업이 자연에 대한 작가의 경험을 적절하게 펼쳐 놓은 것이라면, 부케 작업은 마치 플로리스트가 부케를 만들 듯 작가가 주관적으로 꽃과 자연을 취사 선택하여 한다발의 정물화로 구성한 작업이다. 이 선택의 과정에는 자연에 대한 사색뿐만 아니라 회화라는 장르에 대한 생각이 상당했을 것으로 보인다. 원추형으로 돌려 모아진 부케 하단의 강렬한 직선들이 유난히 그 고민을 짐작케 한다.

대략 2-3년 전부터 이지연은 본격적으로 산책로에서 보게 되는 꽃과 나무, 식물을 풍경 또는 정물의 모습으로 그리기 시작했다. 산책로 시리즈의 선명하고 생동감이 넘치는 다양한 꽃들과 나무, 식물들로 캔버스가 꽉 채워진 화면, 그리고 꼿꼿하게 세워진 원추형 하단부가 인상적인 꽃다발 부케는 이지연이 아직 신진 작가임에도 불구하고 벌써 그의 시그니처 작업들로 인식되고 있다. 그리고 이번 개인전에서도 작가는 이전 작업들의 연장선상에서 작업을 진행하였다. 화려한 색감, 물감의 강한 마티에르, 단순한 묘사로 인해 다소 천진난만해 보이기까지 하는 그림들 앞에서, 그러나 필자는 작가가 처음부터 자연을 대상으로 삼거나 천진난만하게 그림을 그렸던 것이 아님을 알기에 그 변화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이지연은 2018년에 개최한 첫 개인전 《깨끗하고 밝은 곳(A Clean, Well-lighted Place)》(갤러리 175, 서울, 2018)에서 ‘-환경+과정=완성’이라는 작업노트를 공개했던 적이 있다. 이 작업노트의 ‘+과정’ 대목을 인용해보겠다: “내가 의도하는 대로 길이 펼쳐지지 않는다는 불가항력적인 사실을 받아들이는 과정에는 무기력감과 동시에 안락한 감정이 교차한다. 상황이 매번 바뀌고 그럴 때마다 나 자신을 방어하고 적응하도록 만들기 위한 경험과 훈련을 반복하면서 기억이나 있지도 않은 상황을 만들어내는 풍경이 아닌 순간을 기록하는 회화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순간을 그림으로 기록한다는 것은 회화가 내재한 행위에 대한 물음으로 이어진다. 회화는 그리는 행위가 발생하는 동안 감상자가 없지만 행위가 모두 끝나고 난 후에야 비로소 감상자가 오롯이 그림 앞에 서서 감상하게 된다.” 이 글에서 이지연은 그림이 완성되어 감상자 앞에 서기 전, 온전히 화가의 행위가 발생하는 과정에 있는 순간에 대해서 골똘히 생각하고 있다. 당시 그가 그린 소재는 먼지가 굴러다니고 물감 자국이 덕지덕지 묻어 있는 작업실 바닥이나 시멘트 공구리가 된 화단턱이었는데 작가는 이것들을 세상과의 대면을 통해 발견한 것이 아니라, 작업실에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작가로서 그림을 그려야 하는 당위성에 대해 고민할 때 작가의 발에 닿아 있었을 뿐이었다. 그림은 현실도피의 빌미가 되기도 하겠지만 작가에게 가장 엄중한 현실이기도 하다. 그림을 그려야 하는 당위성을 고민할 때 작가는 시선을 멀리 두지 못하고 실기실로 향하는 도중에 보잘것없이 발길에 치이는 화단턱이나 실기실 바닥에 떨어진 물감자국에 시선을 두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그림들은 추상화라고 해도 될 만큼 구체적인 지시대상도 없어 보였다. 먼지나 물감자국을 캔버스 화면에 나른하게 재현한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침잠되어 있는 작가의 심상을 캔버스로 떠낸 것 같은 평면들이었다.

이후 작가는 점차 시선을 멀리 두게 된 듯 2018년 말부터 덤불을 그리기 시작하였다. 이전보다 캔버스의 크기도 커졌고 누가 봐도 화면 가득 수풀이 엉킨 풍경으로 보이는 그림들이었다. 이전 그림들과 비교했을 때 선명한 원색을 적극적으로 사용하고 붓의 필치가 역동적으로 변했기에 당시 필자는 이지연에게 그림에서 얼마나 원근이 느껴지고 얼마나 생동적인 풍경으로 보이는지에 대해 주로 언급했던 것 같다. 필자는그가 정말로 덤불을 묘사하는 것에 관심을 가졌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돌이켜 볼 때 이지연에게 자연의 환영은 크게 중요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가 당시 작업들로 개최한 개인전이 《살과 살(Skin to Skin)》(서교예술실험센터, 서울, 2019)인데 일단 전시제목부터 풍경과는 동떨어져 보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림을 그리는 과정, 캔버스 위에 얹혀지는 작가의 신체적 감각이 유의미한 것으로 보인다. 작가는 주위 풍경에 시선이 머물었던 순간의 감각이 캔버스 위에서 신체적 감각으로 전환되는 것에 집중하였고, 화면상의 뒤엉킨 덤불만큼이나 강렬한 퍼포먼스로 캔버스 표면과 신체적인 접촉을 겪었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살과 살 사이의 감각적 교감이고, 오롯이 화가만이 감각하는 긴밀한 접촉인 것이다. 

이지연은 개인전 《Green Dipped Brush》(누크 갤러리, 서울, 2020)에서부터 본격적으로 산책로 시리즈와 부케 시리즈를 선보였다. 작가는 산책로 주변의 꽃과 식물, 나무들의 형태와 질감을 눈에 담아 기억했다가 캔버스 위에서 붓과 물감을 통해 새로운 감각으로 펼쳐냈다. 초록색 물감에 붓이 풍덩 담겨 묻혀지는 모양, 그 붓으로 캔버스 천에 획을 그어 형태를 만들어 나가는 신체적인 과정을 다시 감각하면서 작가는 산책로를 훑어보듯 그림 속을 다시 훑어보는 것이다. 그렇게 감각이 역순환 되면 강한 붓질로 물감을 올리던 순간의 신체 감각이 붓질 사이를 다시 비집고 올라온다. 그래서 꽃이 흐드러진 덤불 속에서 독서하는 이는 어쩌면 책이 아니라 캔버스 위로 지나간 붓의 흔적과 켜켜이 쌓인 물감 사이를 들여다보고 있는 작가를 빗댄 것일지도 모른다. 그의 산책로 그림은 유난히도 나무, 나뭇가지, 풀, 잎, 꽃, 벌레들이 덤불을 이룰 만큼 수없이 겹쳐 있다. 그런데 이 자연의 모티프들이 화면 위에서 벌이는 일은 자연의 생김새를 보이는 것이 아니라 화면의 틈과 틈 사이를 비집고 조형적 모티프 그 자체로 생동감 있게 존재하는 것이다. 그것은 나뭇잎처럼 보일 것, 꽃잎처럼 보일 것, 오디 열매처럼 보일 것이 아니라, 힘을 준 붓질의 획일 것, 두껍게 올라간 물감 덩어리일 것, 노란 색일 것, 빨간 색일 것, 또는 녹색일 것, 즉 물감과 붓질은 화가가 캔버스 위에 임하게 한 그대로 존재할 것이다. 그 틈에서 스마일/얼굴처럼 보이는 무언가를 발견한다면 그것 역시 스마일/얼굴이 아니라 까만 점이 찍힌 노란 물감의 형상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다.

이번 개인전에서도 작가의 관심사는 ‘무엇처럼 보이게 하는 것’이 아니라, 화면이 갖는 힘, 그리고 조형적인 탐구로 한층 더 나아가고 있음이 감지된다. 짙은 녹색조와 강렬한 붓의 스트로크가 인상적인 < 무제(Untitled) >(2021) 연작은 이전의 덤불 그림들을 연상시키기도 하지만, 각 캔버스마다 확연하게 구분되는 붓질을 의도적으로 행함으로써 전체적으로 붓질의 힘이 두드러지는 작업이다. 이 연작에서 작가는 붓질을 통해 화면을 장악하는 방법을 모색한다. 타원 형태의 스트로크를 반복적으로 그려 휘몰아치는 동세가 느껴지는 캔버스, 뒤엉킨 수풀을 파헤치듯 한없이 뒤엉킨 스트로크가 뭉개어지지 않고 모두 살아 있는 것을 보여주는 캔버스, 그리고 둔탁하지만 좀더 가까이 다가와 결기 있는 붓질을 보여주는 캔버스. 여기에서 우리는 수풀을 보고, 나무를 보기도 하지만, 각 획들에 실린 작가의 결기, 그리고 그 의지가 화면을 장악하는 힘 또한 중요한 것이다. < 갈대와 수국 >(2022) 작업들 역시 이전의 산책로 시리즈와 비교할 때 조형적 탐구 성격이 강하게 나타난다. 이 그림들은 기실 자연스러운 풍경으로 다가오지만, 작가는 부케 시리즈처럼 임의의 자연을 취사선택하여 화면에 모음으로써 실재하지 않는 풍경을 실재하는 것처럼 만들어냈다. 그리고 작가가 취사선택한 자연들은 무엇보다도 조형적 탐구의 재미를 선사한다. 예를 들면 이지연이 한 쌍의 조합으로 선택한 갈대와 수국은 형태적으로 유사하면서도 차이가 있는데, 그는 두 식물 모두에 삼각형 형태를 반복하면서도 선묘와 점묘의 대비로 붓질에 차이를 주었다. 그리고 그 리듬과 밀도의 차이가 전체적인 그림의 인상을 결정하고 있다. 갈대와 다른 식물들을 조합한 풍경에서도 작가는 형상에 따라 붓질의 방법을 달리하여, 붓질을 길게 할 때와 짧게 할 때, 또 힘을 줄 때와 뺄 때의 감각, 점을 하나씩 찍을 때의 감각이 모든 다르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는 좀처럼 넓은 면적을 느슨한 붓질로 채운 표현을 보여주지 않는다. 느슨함을 기대하지 말라는 듯 신경을 곤두세우고 꼿꼿이 서 있는 작업이 부케 시리즈다. 각양각색의 식물들을 한다발로 묶어 세운 이 부케 시리즈는 논리적으로는 실재할 수 없지만 풍성한 한다발의 식물 그 자체로 자연이 주는 힘을 갖고 생명력을 획득한다. 회화적으로는 부케 상단부와 하단부의 대비를 구상과 추상의 대비이자 조합으로 볼 수 있는데, 상단부가 자연의 생명력으로 어필한다면, 원추형 하단부는 붓질의 힘, 즉 회화의 힘을 어필한다. 그런데 신작 부케 작업들은 이전 작업들보다 평면적인 그림으로 변모하고 있는 듯하다. 이전 부케 시리즈는 별도의 공간적 배경 묘사 없이 단색 바탕에 그렸어도 공간적인 시선의 깊이가 보였는데, 신작 부케들은 대체로 화면 아래에 부케가 놓인 바닥이 묘사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부케 자체는 시선의 깊이가 사라지고 훨씬 평면적으로 바뀌었다. 화면 위의 모든 장치들은, 예컨대 꽃, 잎, 풀들로 불릴 형상들과 배경과 바닥으로 구분될 면분할은, 한아름의 꽃다발을 위해서 라기보다는 물감을 바르고 붓질을 하기 위해서, 화면의 조형적 가능성을 타진하기 위해서 취사 선택되거나 구성되어진 모티프들에 훨씬 가깝다.

우리는 이미지를 모방이자 환영이라고 쉽게 치부한다. 그런데 이지연은 그리는 행위가 발생하는 작업실에서 화가에게 이미지는 물질로 먼저 실재하며 화가의 오감을 온통 자극하여 얼마나 곤두서게 만드는지를 보여준다. 이번 개인전에 소개될 작업들을 보기 위해 필자가 작업실을 방문했을 때 그는 작업실 사방 벽을 모두 캔버스로 둘러놓았었다. 전시 준비가 막바지였던 시점이기에 대부분 벌써 완성되었거나 아니면 마무리 작업이 한창인 그림들이었다. 당연히 작업실은 물감 냄새가 진동하였다. 지난 1년 여 동안 직장인처럼 작업실로 출퇴근하며 성실하게 작업만 해온 작가는 자신의 출퇴근 루틴을 덤덤하게 말해주었는데, 인상적으로 들린 것은 작업실에서 밴 물감 냄새가 집에 가면 너무 지독하게 느껴져서 작업실 출퇴근용 복장과 그 외 일상복을 철저히 구분했다는 것이었다. 화가들에게 물감 냄새는 당연한 것이겠지만 후각만큼 기억에 큰 영향을 끼치는 신체 감각도 없으므로 그가 굳이 이를 언급한 이유가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perfume(항수)’의 어원인 ‘per fumum’이 전시제목이 될 거라는 설명까지 들었지만 그날 필자는 이를 물감 냄새와 연결해서 생각하지 못했다. 이 글을 쓰는 지금에서야 전시제목 《페르푸뭄(Per Fumum)》이 지난 1년 동안 이지연의 작업실을 가득 채운, 작가가 후각으로 기억하는 작업의 모든 순간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연기가 통한다’라는 뜻의 라틴어인 ‘per fumum’은 메소포타미아 문명이나 이집트 문명에서 제례나 의식을 치를 때 신과의 교감을 위해서 꽃이나 나뭇잎을 태워 훈향을 낸 것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전시제목을 그림의 대상이 된 꽃들의 향기로 받아들여도 무방하겠지만, 기실 작가에게는 지난 1년 동안 작업실에서 붓질을 통해서 피워낸 물감의 훈향일 것이다. 그리고 고대인들이 꽃이나 식물의 훈향으로 신과의 교감을 절실하게 원했던 것처럼 작업실의 화가에게는 그림과의 교감이 절실했을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보는 이지연의 그림이 자연의 환영 그 이상일 수밖에 없는 이유이며, 완성된 그림이 관람자 앞으로 간 이후에도 오롯이 화가의 기억으로 새겨지는 방식인 것이다.

  < 살과 살 > 展  
  2019.11.03.~11.13. 서교예술실험센터
  글_권태현

  추상인지 풍경인지 모호한 그림들 사이로 얼굴들이 눈에 들어온다. 차곡차곡 쌓아 올린 화면에서 다채로운 빛깔들이 부서지는 그림들과는 달리, 얼굴들은 덤덤한 초록빛 바탕에서 눈코입이 튀어 올라 그 형상을 갖춘다. 푸른 살갗이 붓질의 결을 따라 화면에 동동 떠오르고, 눈은 짙고 두터운 얼룩으로 박혀있다. 눈이 달린 대상을 보는것은 풍경을 관조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감각을 건드린다. 조심스럽게 화면에 다가가니 두껍게 올라있는 덩어리들이 움직이며 표정을 지어 보이다가,순간 다시 뭉그러진 물감으로 돌아가버린다.

 전시 서문을 보니 이지연의 그림들은 작업실의 바닥이나 창밖을 그린 것들이라고 한다. 그곳에서 얼굴들은 어떻게 발견된 것일까. 주어진 단서들을 가지고 하나의 장면을 그려본다. 작가는 창밖에서 태양을 받아 찬란한 빛을 뿜고 있는 초록색 풍경을 화면에 옮기고 있다. 작업에 몰두하다가 고개를 들어보니 태양은 자취를 감추고 바깥에는 벌써 어둠이 살짝 내리깔렸다. 안과 밖의 경계에 놓인 유리창에는 이제 바깥의 풍경 위로 그것을 보고 있는 안쪽의 얼굴이 떠오른다. 흐릿하게 겹쳐있어 그 형체를 제대로 붙잡을 수 없는 얼굴이.

 얼굴은 보여지는 시선의 장소이면서 동시에 보는 기관이다. 프랑스 말에서는 얼굴을 visage라고 하는데, 그것은 라틴어로 ‘보다’라는 뜻의 videre의 과거분사 visus에서 유래한 것이다. 본다는 것은 그 자체로 주체와 대상의 분리를 상정한다. 거기에서 만들어지는 거리를 통해 보여지는 쪽은 어떠한 의미로 파악되어야 하는 위치에 놓인다. 하지만, 이지연이 그려낸 얼굴에는 주체와 대상이, 안과 밖이 뒤엉킨다. 관조의 대상인 풍경 속에서 그것을 보고 있는 얼굴이 솟아오르기 때문이다.

 풍경이라는 것은 세계를 틀에 넣어 대상으로 구성할 수 있어야 가능해진다. 풍경은 그렇게 주체와 대상의 분할을 기반으로 하지만, 동시에 그것을 만든 구조를 감추어버리기도 한다. 이번 전시에서 이지연의 그림들은 그런 풍경의 구조 자체를 문제 삼는다. 그의 작업에서는 풍경과 풍경을 발견한 얼굴이 하나의 이미지 안에서, 혹은이미지들 사이를 가로지르며 교차되고 있다. 주체와 대상이 교란되며 유리창, 손, 눈, 뇌, 캔버스 사이를 왔다갔다 하는 이미지가 그려진다. 그곳에서 풀과 나무와 넝쿨과 도끼다시 바닥과 엉킨 물감들, 그리고 얼굴들이 어렴풋이 모습을 드러낸다.

 그는 분명 창밖의 풍경이나 바닥의 모습을 관찰하여 캔버스에 옮겼지만, 그것은 대상을 보는 문제에 머물지 않는다. 이지연이 그려낸 대상에는 그것을 보고 있는 주체의 모습이 비쳐 나온다. 보고 있는 상태 자체가 그려진다. 바깥의 세계가 어두워져 형체를 파악하기 어려워질수록 얼굴은 점점 더 선명하게 떠오른다. 이지연은 풍경에서 얼굴을 건져 올리며, 세계를 보는 얼굴을 통해 세계에 얼굴을 부여한다. 그렇게 《살과 살》이라는 전시에서 물감들은 얼굴을 빚어내는 살덩이가 된다.
[출처] [리뷰] 소액다컴 선정 프로젝트 / 이지연 < 살과 살 > (서교예술실험센터) |작성자 서교예술실험센터00


 

 


2018 개인전 전시서문


  < 깨끗하고 밝은 곳 > 展
  2018.5.15.~5.26. Gallery175
  글_박이주

 < 무욕한, 조형에의 집요: 실재實在와 실제實際의 경계에서 >                                                                                      
  스스로의 표현에 따르면, 이지연은 더럽고 어두운 작업 공간에 자기를 가두듯이 하고 지난 1년간 그림을 그려왔다. 여느 작가의 삶이 그러하듯 자신의 미술과 생존을 위해 싸워야 했고 고립되었다. 그는 여러 사람이 거쳐 간 물감이 덕지덕지 묻은 작업실 바닥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겨야 할 여러 싸움 가운데에,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잠시나마 현실에서 도망쳐 머물도록 허락된 자리는 바닥의 버려진 것들에 있었다. 학부를 졸업하기 전까지 작업을 했던 나는 작가적 삶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자기와 분투하다 한없이 작아진 작가라는 인간은 작업실 바닥에 버려진 낙서된 휴짓조각이나 눌어붙은 물감 자국에 집중하면서 안락과 평온을 찾았을 것이다. 사소하고 조그마한, 버려진 ‘조형’에 안착하자 그의 작업 공간은 깨끗하고 밝은 곳이 되었다.  
  2015년부터 최근까지의 작업 전반을 살피면, 작가가 회화의 소재로 삼는 대상은 도시의 자연, 거리, 건물 그리고 최근의 작업실 바닥과 화단에 이르기까지 그 범위가 다양하며 소재 선택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대신, 이지연은 본능에 가까워 보일 정도로 비례와 균형, 조화와 율동, 통일과 변화 등 순수조형 요소들 사이의 어울림과 시각적 리듬감 같은 회화의 시각적 흥미 획득에 관심이 있는 듯하다. 이러한 작가적 특성은 흥미롭게도 결과적으로는 회화의 ‘환영’과 ‘자기 지시성’의 문제를 생각하도록 한다.
 캔버스는 자기 앞에선 관객에게 ‘실재’(實在:인식 주체로부터 독립해 객관적으로 존재한다고 여겨지는 것)한다고 믿고 있는 환영의 공간을 펼친다. 그러나 작가에 의해 강조된, 회화의 조형미는 그 모습을 서서히 드러낸다. 이로 인해 환영을 일으키기 위한 전제 조건인 원근이나 비례 등은 무너지고, 관객은 시각적인 어색함과 불명료함으로 회화에 온전히 몰입하지 못한 채 어느 정도의 단절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갈 곳을 잃은 관객은 자신의 눈앞에 놓인 세계를 다시 살핀다. 이는 작가의 개입으로 인해 ‘실제’(實際:개인의 직접경험을 통해 무언가를 직접 행하거나 느끼는 것)가 된 ‘실재’가 사실 자신은 ‘회화’라 말하기 때문에 비롯되는 것이다.
 작업실 바닥을 다룬 그의 최근 회화가 주는 시각 경험은 환영과 비환영이 끊임없이 교차하는 홀로그램(hologram)을 바라볼 때와 유사하다. 이는 작가의 회화에서 다층적인 기능을 하는 물감의 역할에서 연유한다. 넓게 펴 발라져 작업 공간의 바닥 자체로 혹은 바닥의 뜯겨나간 타일 조각으로 환영을 일으키고, 화면의 조형미를 획득하는 조형요소 중 하나로 그 모습을 드러내거나 물감이 가진 질감은 어느 순간 그림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것이 되어 환영을 해체하기도 한다. 특히, 그려지거나 묘사된 것이 아니라 꼭 그런 모양으로 있어야 했던 것처럼 뻔뻔하게 캔버스에 ‘물감으로’ 얹혀 있는 물감 자국은 환영을 일으키는 데 일조하고, 그것이 조형요소로서 두드러질 때는 환영을 해체하는 역할을 동시에 수행한다. 마지막의 경우, 모더니즘이 말했던 회화의 자기 지시성이 강해진다. 그러나 물감 자국이 실은 진짜 물감이기 때문에 발생하는 또 다른 자기 지시성에 의해 자국은 다시 환영의 옷을 입는다.
  이지연의 회화는 실재와 실제의 경계를 동시다발적으로 넘나들며 회화 스스로 주체가 되어 관객에게 말을 건넨다. 더럽고 어두운 작업 공간에서 바닥을 주시하며 자신이 안착할 곳을 찾았을 때, 조형이 작가에게 그 자리가 되었다. 작가라는 한없이 작아진 인간에게는 자신의 생존과 미술을 위해 사랑할 대상이 필요했다. 그것은 자기에게 단순하고 조용했던, 순수 조형요소들과 그들이 내포한 미의 가능성에 있었다. 이후 그의 회화에서 그들이 커져 버렸을 때 이지연의 회화는 활기 넘치며 유의미한, 실재와 실제의 각축장이 되었다. 회화로서의 말을 건네는 이지연의 회화는 무욕하고 집요한, 차가우며 본능적인 회화이다.
  끝으로, 이 모든 이지연 회화 읽기는 미술 동료이면서 인간으로도 꽤 오랜 시간 그를 알고 지낸 박이주라는 한 개인의 시각일 뿐이라는 점을 주지하고 싶다. 따라서 글을 쓰는 동안 친밀하면서도 거리감 있는 비평의 태도를 견지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또한, 한 작가의 작업세계의 지향은 언제나 그렇듯 비평과 함께하되, 분리되어야 한다는 점을 새삼스럽게 밝히는 바이다.